원지는 동우당 제약회사 도라지 재배단지를 떠나 산을 내려가다가 발견됐다. 사과배 과수원 옆의 길섶에 있었다.
“원지다!” 신민교 교수(원광대)가 소리질렀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그의 발목에 원지가 감겨있었다. 원지는 이슬을 머금은 채 길섶에 비스듬히 나와 있어 마치도 아름다운 처녀가 수려한 팔을 내민 듯한 모습이다. 신 교수는 귀한 약초라고 반기면서 정성들여 촬영한다.

자연이 만든 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어긋나는 줄칼 모양의 사선으로 뻗은 기다란 잎사귀며, 보라빛의 앙증맞은 꽃, 대가 가늘지만 단단하게 생겨서 청초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신 교수는 이 약초의 뿌리를 원지라 하며 거담제, 강장제, 강정제로 쓴다고 했다.

원지의 한자를 물었더니 누군가 遠志라고 써주었다. 중국 약초사전을 들추어보았더니 원지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성심장(醒心杖), 극완(棘완), 12월화(十二月花), 산호마(山胡麻), 양초(陽草), 소초(小草)… 원지는 익지강지(益智强志)한다하여 오래도록 뜻을 간직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약초는 낯설지만 이름은 무척 눈에 익었다. 중국에서는 遠志라는 상호를 즐겨 쓰기 때문이다. 원지공부홈페이지, 남경원지회사, 북경원지광고 유한회사, 광주 원지 과학기술개발 유한회사, 절강 중의학원, 원지인터넷… 모두 약재와는 아무 관계없는 회사들이다. 다만 단어의 뜻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원지는 이름의 의미 때문에 약초를 초월한 상징의 뜻으로 쓰인다. 삼국시대에 촉국 장령 강유의 모친이 적군에 체포됐을 때 강유는 어머니에게 원지와 당귀(當歸)를 사서 보냈다. 遠志는 큰 뜻을 의미하고, 當歸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강유의 모친은 애국의 큰 뜻을 이루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하는 아들의 뜻을 곧 알게 된다.

원지의 의미는 그의 또 다른 이름 소초(小草)와 대비되면서 더 깊은 의미를 나타내는 모양이다. 남조 때의 저서 《세설신어》에 의하면, 동진 때에 사안이라는 은둔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귀순하라고 여러 번 권고했지만 매번 거절했다. 후에는 웬일인지 저절로 산을 내려 환온의 사마관이 되었다. 어느 날 환온은 누군가 보내준 원지를 보고 사안에게 이 약초를 왜 원지라고도 하고 작은 풀이라고도 하느냐고 물었다. 중국말로 小草는 작은 풀이라는 뜻이다. 이 때 곁에 있던 대신 학융이 대답했다.

“이는 이해하기 쉬운 문제입니다. 처측위원지, 출측위소초, 즉 산에 머물러있으면 원지요, 떠나면 풀입니다. 은둔하면 원지이고 산을 내려오면 풀이 되는 거지요.”
학융의 교묘한 풍자에 사안은 곧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遠志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새겨보며 문뜩 소기골 주변의 산을 두리번거린다. 하얀 비석으로 된 은둔자를 찾는다. 하얀 두루마기를 날리며 이 길 옆의 사과배나무 속으로 하얗게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 듯 하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 이 소기골에서 사과배를 재배해낸 최창호 노인이 그야말로 학융이 말한 원지가 아닐까 싶다.

1921년에 20대 초반의 최창호는 동생이 북한 고향에서 가져온 과일접수지(접穗枝)를 3년생 돌배나무 여섯 그루에 접목했다. 이듬해에 세 그루가 죽고 세 그루가 살았다. 7년째 되던 해에 세 나무에서는 전에 보지 못한 과일이 달렸다. 먹어보니 무척 달콤했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과일을 ‘참배’라고 부르다가, 후에는 ‘사과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그는 한학에 정통한 학자로서 부친과 함께 《광영학교》를 꾸려 반일지사를 양성하고 약국을 꾸려 마을사람들의 병을 봐주었다. 하지만 광복 후 토지개혁 때에는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부농(富農)으로 획분(劃分) 된다. 공작대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도끼에 박산이 난 아버지의 비석조각들을 이른 새벽에 땅속에 파묻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다.

사과배는 이 작은 소기골에서 중국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구 소련, 체코, 북한 등 14개 나라로 퍼져나갔다. 용정시 정부에서는 1989년에 소기골의 세 그루 母樹에 ‘사과배 선조 기념비’를 세워 그 역사와 공적을 기리었다. 1990년에는 중국 전 지역 과일 평가회의에서 당도가 가장 높은 과일로 평가되어 중앙 권위부문으로부터 ‘배 중의 왕’이라는 월계관을 쓰게 되고, 1995년에는 소기골이 속해있는 용정시가 ‘중국 사과배 고향’으로 명명된다.

사과배는 약효가 좋아서 어렸을 때 기침을 하면 어머니가 사과배의 속을 파고 그 속에 꿀을 넣어 솥에 쪄서 먹이곤 했다. 밤을 자고 나면 가래가 삭고 기침이 수그러들었다. 버섯냉채(무침)나 냉면에도 사과배를 얇게 베어서 넣곤 한다.

사과배는 모양이 사과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해서 사과배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모양은 사과이나 먹으면 배 맛이고, 딸 때는 사과같이 불그레하나 움에 저장하면 배같이 노랗다.
우리는 사과배가 중국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우리 자신을 닮았다고 한다. 고국의 문화를 중국 본토문화에 접목해 태어난 문화, 고국의 전통문화를 지켜가며 중국문화에 적응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족은 해외 한민족 중 우리 말, 우리 글을 망라한 전통문화를 가장 잘 지키고 있고,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교육수준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 세계 50여 개 나라에 나가서 억척스레 일해 경제력을 키우고, 한중수교의 동풍을 타고 재빨리 중국 연해주 대도시에 나가 삶의 새 터전과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사과배에는 고국에 대한 깊은 망향의식과 생명의 큰 뜻이 담겨져 있다.

거의 한 세기를 낯설은 땅에서 풍운변화를 겪으며 드디어 중국의 ‘배 중의 왕’이 된 사과배, 130년에 걸쳐 중국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선 조선족이다.
소기골에서 빗물을 머금고 청초한 모습으로 서있는 원지를 보며, 사과배 모수 세 그루를 떠올리고 최창호 노인을 떠올리고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