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소기골을 떠나 용정방향으로 달렸다. 약초 촬영이 끝나고 정유국 씨의 집 울타리를 나서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창가로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일행은 하늘에 감사했다. 차는 동으로 달려 동불사를 지나고 조양천을 지나 해란강이 보이는 용문교에 들어섰다.
용정은 광복 전에 우리 조선족의 문화중심 및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가장 먼저 이 땅에 이주한 사람은 장인석, 박윤언이란 농민이었는데, 그 때가 1884년이다. 그들이 버들과 갈대를 베고 불을 질렀던 흔적이 해란강반의 저 넓은 들에 남아있을 것이다. 1906년에는 이름난 애국 투사 이상설, 이동녕, 왕창동 등 인사들이 ‘세전서숙’을 꾸려 해외 반일교육의 장을 열었고, 1919년에는 3.1운동의 연장선인 3.13운동이 일어나 해외 반일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길옆으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서 깊은 용정우물이 스쳐 지난다. 장인석, 박윤언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한밤중에 집안이 환하여 바라보니 우물가에 서기가 피어나면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전설의 우물이다.
차가 용정에서 5분 정도 더 달리자 해란강가에 세전벌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다.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융단을 편 듯이 반듯한데, 미풍에 푸른 벼가 넘실댄다. 차를 타고 세전벌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백여 년 전 살길을 찾아 헤매던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을 보고 그 얼마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으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넓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펼쳐진 땅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 7월의 논밭은 한결 푸르다.
한국 동우당제약의 옴니허브 약재작업장은 세전벌의 태평촌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비닐지붕아래 구멍이 숭숭한 채발로 된 선반에 깨끗하게 정리된 야생 도라지와 사삼, 가시오갈피가 가득 널려있다. 그 옆 기계소리가 나는 건축물은 약재 건조실이었다. 나무로 불을 때고 풍구를 통해 열을 바람으로 순환시켜 약재를 말린다고 했다. 비닐지붕에 내리는 빗소리가 가락 맞게 들려오고 약재의 특유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변에는 보라빛 술을 드리운 옥수수가 한창이고 울타리에는 통통한 唐콩이 가득 매달려있다.
약초 아바이 최진만씨는 옴니허브 작업장에서 약재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 66세, 씩씩한 모습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몸에 아무런 병도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최대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약초인생이 건강을 만든 것이리라.
최진만 씨는 청년시절부터 약초에 대한 애호가 각별했다. 약초공부를 할 여건이 안돼 약초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자습했다. 산을 돌아다니며 책에서 본 약초그림과 대조해 틈틈이 약초를 익혔다. 한 약초는 반드시 세 번 확인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림에 따라 약초를 찾고, 봄에 싹이 돋은 모습, 꽃이 핀 모습, 가을에 열매가 달린 모습을 비교해서 책에서 본 약초임을 확인했다. 약의 성능은 반드시 책의 설명에 근거해 자신이 먹어보며 익혔다.
그는 용정시 광신향 용지촌에 살고있었는데, 30대 초반인 70년대부터 약초재배를 하였다. 그 때 마을에는 위생소(衛生所, 지금은 향병원임)가 있었는데 최진만 씨는 그 병원의 제약일꾼이었다. 병원의 직원은 총 4명, 의사 1명, 보조의사 1명, 약제사 1명, 제약일꾼 1명이었다.
70년대는 ‘문화혁명’ 시기이다. 이른바 ‘문화혁명’이라는 것은 1966년부터 10년간 모택동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킨 대동란(大動亂)을 말한다. 모택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대 중학생들인 ‘홍위병’ 백만 명을 북경에서 수차 접견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기치를 들고 곧 거리로 뛰쳐나가 모택동의 반대파인 국가 주석 유소기를 저택에서 끌어내 타도하고, 중앙 총서기였던 등소평을 타도하고, 모든 높고 낮은 집권자들에게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라는 패쪽(작은 흑판모양의 나무 간판에 죄명을 적어 목에 걸게 함)을 메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조리돌림을 하여 타도했다.
이 시기에 용정현 위생국 국장이었던 사람도 조리돌림을 당하고 이 마을에 노동개조하러 쫓겨왔다. 국장은 의사출신이라 초가 하나에 위생소 패쪽을 달고 의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쌀독이 빈 며느리모양으로 약이 없어 의사노릇을 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마비상태고, 병원마다 약품창고가 바닥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 한번 받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교통이 불편해 소수레를 타거나 도보로 수십 리를 걸어서 병원에 찾아오곤 했다.
농민들은 죽을 정도가 아니고는 병을 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이긴 해도 용정 위생국 국장이었던 의사가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농민들에게 그야말로 큰 은혜였다.
당시는 이른바 ‘합작의료’ 시기여서 해마다 농민들에게서 20원 정도(한화 3천원에 해당함)를 거두고 평소에는 무료로 치료했다. 농민들이 지불한 합작의료비로는 어림도 없다. 약재의 원가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국장은 약재를 심고, 약을 만들기로 했다. 연변에서 나지 않고 남방에서 나는 약재는 농민들이 지불한 돈으로 사들였다. 국장은 역시 국장이었는지라 병원에 사정하여 고압 솥을 얻어왔다. 제약설비를 갖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이 위생소에 약재를 제공하는 약초 관리원 겸 제약일꾼이 되었다.
최진만 씨는 밭에 원지, 용담초, 시호, 방풍, 황기, 오미자, 구기자 등 수십가지의 약초를 심었다. 고압솥에 익모초와 생당쑥을 달여 익모초환을 만들고 승마, 용담초 등에 계피를 섞어 달여서 감기약을 만들고, 부족한 약재를 약방에서 사다가 십전대보환, 보신환 등 환약을 만들었다.
연변농학원 제약공장의 설비를 빌려 주사약도 만들었다. 포도당원료를 끓여 증류수를 받아 주사약을 만들고, 개의 뇌를 증류가마에 달여 신경환자들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만들었다. 제약이 힘들 때는 위생소의 4명이 전부 동원돼 밤 늦게까지 약을 만들곤 했다.
국장은 재배한 약재에 근거해 약방에서 부족한 약재를 사다가 처방을 내서 농민들의 감기를 치료하고 기침을 떼 주고, 여성들의 냉병을 치료하여 아기를 낳게 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들을 보신해주고, 기타 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농민들의 집에 찾아가서까지 왕진하며 애를 쓴 보람에 이 위생소는 점점 더 소문이 나서 농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줄을 섰다. 그 때마다 최진만 씨는 마음이 흐뭇했다고 한다.
70년대가 지나가고 ‘문화혁명’도 끝나고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이 되자 ‘합작의료’는 종료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농사하는 한편 약초를 캐서 팔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인연이 수두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연은 자기의 애호(愛好)가 맺어주는 것이다. 최진만 씨도 약초에 대한 사랑이 인연이 되어 1994년에 한국 동우당제약과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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