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허브가 직접 답사한 산지의 이야기 입니다.

도라지 관리원 정유국 씨의 집 대야에 마치현(馬齒현)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잎사귀는 떼고 줄기만 손가락만큼한 크기로 잘라서 데쳐낸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리줄기를 따놓은 줄로 알았다. 줄기가 통통하여 고사리를 닮았다. 정유국 씨는 마치현을 기름에 볶아서 요리해 먹는다고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약전(藥典)≫에 의하면 마치현은 열을 내리고 습을 없애고 부기를 내린다. 마치현은 악창(惡瘡)에도 좋은 외과 약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의학가 맹선(孟詵)은 마치현 찹쌀 죽으로 ‘기가 통하지 않아 생기는 설사나 창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이 증명한데 의하면 마치현은 피부염, 각막염, 결합막의 정상기능 회복, 야맹증 등에 좋고,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구강점막궤양 등에도 좋다고 한다. 또 임파결핵궤양, 급성맹장염, 산후열 등도 치료한다고 한다.

마치현을 민간에서 우리말로 ‘도덕풀(도적풀)’ 또는 ‘돼지풀’이라고 불렀으므로 나도 그렇게 불러왔다. 땅에 넝쿨을 뻗으며 기어가듯이 붙어서 자란다고 ‘도적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돼지풀’이라는 이름은 돼지가 좋아해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쇠비름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마치현은 잎사귀가 큰 물방울모양으로 갸름하고 통통하고 줄기가 기름지고 탄력이 넘친다. 넝쿨처럼 옆으로 뻗었으므로 위로만 솟은 다른 식물처럼 따분하지 않고 개방적이다. 마치현의 잎사귀 모양이 말 이빨처럼 생겼다고 마치현이라고 불렀을 것이지만, 그 이름은 마치현의 귀엽고 예쁜 모양에는 손색이 가는 이름이다.

마치현은 이름이 수십 가지라고 한다.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의 모양이 귀여워서 ‘팡와와(방娃娃<방와와>)’, 즉 ‘포동포동한 아기’라고 부르고,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이 아무리 바람이 불고 태양이 쬐여도 쉽게 시들지 않는다고 ‘장수초’, 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심불감(心不甘)’이라고 부른다.

마치현은 색깔이 푸른빛인가 하면 자주 빛이 섞여있고, 이렇게 볼 때는 푸른빛이고 저렇게 볼 때는 자주 빛이다. 그래서 마치현은 ‘오행초’ 또는 ‘오방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잎사귀는 청빛, 줄기는 적색, 뿌리는 백색, 씨는 검은 색’이기 때문에 목화토금수 오행색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전설에 의해 ‘태양초’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늘에 해 열 개가 동시에 떠서 강바닥이 갈라 터지고 곡식이 말라죽게 되었다. 후예라는 용사가 나타나 해들을 하나하나 쏘아 아홉 개를 떨구었다. 열 번째 태양은 마치현의 잎사귀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해는 마치현의 구명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마치현에게만은 불벼락을 쏟지 않아 마치현이 늘 싱싱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현은 또 ‘보은초(報恩草)’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조선족이 적고 한족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족은 단층 줄집에서 살았고, 한족들은 청나라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검은 기와를 얹은 독집, 독 울안에서 살았다. 한족 집의 높은 대문을 열면 뜰 안에는 가득 마치현이 널려 있곤 했다.

다른 풀들은 자르거나 뽑아놓으면 금방 시드는데 마치현은 수일이 지나도 싱싱하고 기름졌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소꿉놀이를 할 때면 마치현이 늘 요리로 오르곤 했다.
한족들은 옛날부터 마치현을 야채로 취급해왔다. 여름과 가을이면 그들은 마치현의 뿌리를 자르고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데쳐낸 후, 물기를 빼서 소금, 식초, 간장, 생강즙, 마늘즙, 깨 기름에 메워서 먹는다.

또는 마치현을 밀가루에 섞어 지짐이를 구워서 먹거나, 마치현소를 넣고 기름떡을 하거나 보우즈[包子]를 빚어서 시루에 쪄 먹기도 했다. 일부는 말려서 저장했다가 음력설 음식인 죠즈[餃子]를 만들어 먹곤 했다.

음력설에 먹는 죠즈(물만두)는 한족들에게 있어 경건한 음식이다. 해마다 한번씩 마을에 와 사람을 잡아가는 연(年)이라는 귀신을 쫓고나서 사람들은 설을 쇠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설을 쇤다는 말을 중국말로 과년(過年)이라고 한다.

말발굽모양으로 만든 죠즈에는 새해에 부자가 되라는 소망이 스며있다. 죠즈를 많이 먹을수록 돈을 많이 번다고 하여 한족들은 음력 그믐날 밤 12시에 온 가족이 모여 죠즈를 먹는다. 이처럼 중요한 음식에 마치현소를 넣은 것을 보면 마치현은 민간에서 길한 식물이다.
하지만 도시의 식탁에서는 마치현을 볼 수 없다. 층집이 높아갈수록 인간은 마치현을 망라한 자연을 멀리하게 된 모양이다.

정유국 씨는 장춘(길림성 소재지)에서 열린 동북삼성 농업박람회에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이 전시돼있더라고 하면서, 약초로도 좋지만 건강에도 좋은 요리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자라는 마치현은 땅에 붙은 채 넝쿨모양으로 뻗어 수확하기 불편한데,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은 부추처럼 곧게 자라서 낫으로 수확하기 좋을 것 같더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언젠가 마치현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우리의 식탁에 한자리 굳힌 부추나 시금치, 홍당무처럼 말이다. 수입품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니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과시하고 있는 듯싶다. 또 마치현이 수입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마치현을 멀리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마치현과 마치현들이 가득한 생명의 자연을 말이다.

마치현에 대해 우리 연변말로 ‘도적풀’이나 ‘돼지풀’이라고 했던 이름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너무 큰 혜택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인간의 깨달음에 달린 일이다.
약초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깊은 계시이다. “자연에 겸허하게 머리 숙이라, 마음을 열어라, 귀를 기울이라”고 마치현은 말하고 있었다.

차는 소기골을 떠나 용정방향으로 달렸다. 약초 촬영이 끝나고 정유국 씨의 집 울타리를 나서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창가로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일행은 하늘에 감사했다. 차는 동으로 달려 동불사를 지나고 조양천을 지나 해란강이 보이는 용문교에 들어섰다.

용정은 광복 전에 우리 조선족의 문화중심 및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가장 먼저 이 땅에 이주한 사람은 장인석, 박윤언이란 농민이었는데, 그 때가 1884년이다. 그들이 버들과 갈대를 베고 불을 질렀던 흔적이 해란강반의 저 넓은 들에 남아있을 것이다. 1906년에는 이름난 애국 투사 이상설, 이동녕, 왕창동 등 인사들이 ‘세전서숙’을 꾸려 해외 반일교육의 장을 열었고, 1919년에는 3.1운동의 연장선인 3.13운동이 일어나 해외 반일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길옆으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서 깊은 용정우물이 스쳐 지난다. 장인석, 박윤언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한밤중에 집안이 환하여 바라보니 우물가에 서기가 피어나면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전설의 우물이다.

차가 용정에서 5분 정도 더 달리자 해란강가에 세전벌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다.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융단을 편 듯이 반듯한데, 미풍에 푸른 벼가 넘실댄다. 차를 타고 세전벌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백여 년 전 살길을 찾아 헤매던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을 보고 그 얼마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으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넓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펼쳐진 땅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 7월의 논밭은 한결 푸르다.

한국 동우당제약의 옴니허브 약재작업장은 세전벌의 태평촌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비닐지붕아래 구멍이 숭숭한 채발로 된 선반에 깨끗하게 정리된 야생 도라지와 사삼, 가시오갈피가 가득 널려있다. 그 옆 기계소리가 나는 건축물은 약재 건조실이었다. 나무로 불을 때고 풍구를 통해 열을 바람으로 순환시켜 약재를 말린다고 했다. 비닐지붕에 내리는 빗소리가 가락 맞게 들려오고 약재의 특유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변에는 보라빛 술을 드리운 옥수수가 한창이고 울타리에는 통통한 唐콩이 가득 매달려있다.

약초 아바이 최진만씨옴니허브 작업장에서 약재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 66세, 씩씩한 모습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몸에 아무런 병도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최대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약초인생이 건강을 만든 것이리라.

최진만 씨는 청년시절부터 약초에 대한 애호가 각별했다. 약초공부를 할 여건이 안돼 약초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자습했다. 산을 돌아다니며 책에서 본 약초그림과 대조해 틈틈이 약초를 익혔다. 한 약초는 반드시 세 번 확인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림에 따라 약초를 찾고, 봄에 싹이 돋은 모습, 꽃이 핀 모습, 가을에 열매가 달린 모습을 비교해서 책에서 본 약초임을 확인했다. 약의 성능은 반드시 책의 설명에 근거해 자신이 먹어보며 익혔다.

그는 용정시 광신향 용지촌에 살고있었는데, 30대 초반인 70년대부터 약초재배를 하였다. 그 때 마을에는 위생소(衛生所, 지금은 향병원임)가 있었는데 최진만 씨는 그 병원의 제약일꾼이었다. 병원의 직원은 총 4명, 의사 1명, 보조의사 1명, 약제사 1명, 제약일꾼 1명이었다.

70년대는 ‘문화혁명’ 시기이다. 이른바 ‘문화혁명’이라는 것은 1966년부터 10년간 모택동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킨 대동란(大動亂)을 말한다. 모택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대 중학생들인 ‘홍위병’ 백만 명을 북경에서 수차 접견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기치를 들고 곧 거리로 뛰쳐나가 모택동의 반대파인 국가 주석 유소기를 저택에서 끌어내 타도하고, 중앙 총서기였던 등소평을 타도하고, 모든 높고 낮은 집권자들에게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라는 패쪽(작은 흑판모양의 나무 간판에 죄명을 적어 목에 걸게 함)을 메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조리돌림을 하여 타도했다.

이 시기에 용정현 위생국 국장이었던 사람도 조리돌림을 당하고 이 마을에 노동개조하러 쫓겨왔다. 국장은 의사출신이라 초가 하나에 위생소 패쪽을 달고 의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쌀독이 빈 며느리모양으로 약이 없어 의사노릇을 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마비상태고, 병원마다 약품창고가 바닥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 한번 받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교통이 불편해 소수레를 타거나 도보로 수십 리를 걸어서 병원에 찾아오곤 했다.

농민들은 죽을 정도가 아니고는 병을 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이긴 해도 용정 위생국 국장이었던 의사가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농민들에게 그야말로 큰 은혜였다.

당시는 이른바 ‘합작의료’ 시기여서 해마다 농민들에게서 20원 정도(한화 3천원에 해당함)를 거두고 평소에는 무료로 치료했다. 농민들이 지불한 합작의료비로는 어림도 없다. 약재의 원가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국장은 약재를 심고, 약을 만들기로 했다. 연변에서 나지 않고 남방에서 나는 약재는 농민들이 지불한 돈으로 사들였다. 국장은 역시 국장이었는지라 병원에 사정하여 고압 솥을 얻어왔다. 제약설비를 갖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이 위생소에 약재를 제공하는 약초 관리원 겸 제약일꾼이 되었다.

최진만 씨는 밭에 원지, 용담초, 시호, 방풍, 황기, 오미자, 구기자 등 수십가지의 약초를 심었다. 고압솥에 익모초와 생당쑥을 달여 익모초환을 만들고 승마, 용담초 등에 계피를 섞어 달여서 감기약을 만들고, 부족한 약재를 약방에서 사다가 십전대보환, 보신환 등 환약을 만들었다.

연변농학원 제약공장의 설비를 빌려 주사약도 만들었다. 포도당원료를 끓여 증류수를 받아 주사약을 만들고, 개의 뇌를 증류가마에 달여 신경환자들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만들었다. 제약이 힘들 때는 위생소의 4명이 전부 동원돼 밤 늦게까지 약을 만들곤 했다.

국장은 재배한 약재에 근거해 약방에서 부족한 약재를 사다가 처방을 내서 농민들의 감기를 치료하고 기침을 떼 주고, 여성들의 냉병을 치료하여 아기를 낳게 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들을 보신해주고, 기타 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농민들의 집에 찾아가서까지 왕진하며 애를 쓴 보람에 이 위생소는 점점 더 소문이 나서 농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줄을 섰다. 그 때마다 최진만 씨는 마음이 흐뭇했다고 한다.

70년대가 지나가고 ‘문화혁명’도 끝나고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이 되자 ‘합작의료’는 종료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농사하는 한편 약초를 캐서 팔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인연이 수두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연은 자기의 애호(愛好)가 맺어주는 것이다. 최진만 씨도 약초에 대한 사랑이 인연이 되어 1994년에 한국 동우당제약과 만나게 됐다.

7월 25일은 연변약초 답사 첫 날이다. 한창 우기여서 장마비가 내렸다. 일행은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 허담 원장, 한국 저명한 본초학 학자인 신민교 교수, 정종길 교수 등 모두 8명, 오후 2시반 경에 연길에서 출발했다. 차창밖으로 도심을 가로질러 두만강의 가장 큰 지류인 부르하통하가 빗물에 불어 풍만한 모습으로 흘러갔다.


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어 시작, 영금, 수확, 마침을 알려주고, 해와 달이 있어 낮과 밤,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알려준다. 자연이 만든 인간이기에 우리의 생리에도 계절이 있고 해와 달이 있는 것이다. 자연을 어기면 벌을 받기 마련이다. 오래 동안 자신을 혹사했다는 느낌이 생긴 것은 작년부터이다.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자연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만나리라 결심하고 등산계획을 세웠다. 결심이 앞선 것인지 인연이 앞선 것인지,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의 약초 답사길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연변에 대한 답사는 이번까지 크게 세 번이 된다. 1989년 여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문물 고찰단의 일원으로 답사 길에 오른 적이 있다. 연변 곳곳에 숨쉬고 있는 고구려, 발해의 유적들, 지금은 분토로 남은 그 찬란한 역사를 한줌의 흙에서 느끼며 진한 감동을 느꼈다. 1991년 겨울에는 문인친구들과 함께 조선족의 중국 입주노선을 따라 답사하면서 한인(韓人)으로부터 중국 조선족이 된 우리의 백여 년 역사를 취재했다. 이번에는 약초답사, 이 땅의 숨결을 또 다른 측면에서 느껴보게 되는 것이다.

연변은 삼림이 많고 고산준령이 많은 등 지리, 지형, 그리고 독특한 기후 조건 때문에 약초가 많이 난다. 특히 산 고도에 따른 기후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침활엽수 림대(林帶), 침엽수 림대, 사스래 림대, 고산 툰드라대가 뚜렷이 분포돼있어 한 산맥에서 동시에 부동한 기후조건의 식물이 자란다. 그야말로 보기에 흔치 않은 독특한 식물의 왕국이다. <<길림성개요>>에 기록된 데 의하면 장백산에는 천여 종 이상의 약용식물이 자라고 있다. 인삼, 당삼, 동충하초, 황기, 평패모, 세신, 천마, 북오미자, 동북 자인삼, 목통, 두향, 장백 서향, 원호, 천산룡, 방풍, 위령선, 선황련… 등 진귀한 약재가 많이 난다. 야산삼, 목령지, 불로초, 북기 등은 장백산 외에는 얻기 힘든 약초이다.

장백산에는 또 300여종의 동물이 살고 있어 동물약재도 많이 난다. 그중 록용, 호골, 녹태, 녹변, 사향, 웅담, 오소리기름, 하마유 등 모두가 진귀한 약재들이다. 중국에서 <<관동 3보(關東三寶)>>라고 일컬으는 인삼, 돈피, 록용은 모두 백두산 특산물이다. 1980년에 유엔은 백두산을 세계인류생물권 보호구로 정하고 세계자연 보류지의 하나로 인정했다.

연변은 개발역사가 100여 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불분이확(不糞而穫)>>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비료를 치지 않아도 수확되는 살찐 땅이다. 이 땅이 특별히 비옥한 까닭은 청정부에 의해 200여년간 봉금 돼 있었기 때문이다.

건륭 황제는 <<성경(심양), 길림은 본조 룡흥지지(本朝龍興之地)>>라고 말한 바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59년에 발바닥에 일곱 개의 붉은 기미가 있다는 청나라 제1황제 누르하치가 심양 지역인 요녕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회령군 오지암전설(<<지명유래>>, 한국출판.)에는 누르하치가 북한 회령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져있다. 누르하치는 지금의 심양 일대, 송화강 유역과 연변, 러시아의 일부 지역을 누비며 여진족을 통일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대명강산을 정복해 청나라를 세웠다.

1677년에 청정부는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이북 천여 리를 청조발상지로 정하고 봉금 정책을 실시했다.

|산삼산, 위렵산, 포주하를 정하고 인삼을 망라한 귀중한 약초와 진주, 그리고 돈피, 사슴, 표범, 범, 곰 등은 관리를 파견해 왕궁에 바치게 했다. 어명을 받고 약초를 캐고 수렵을 하고 포주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관리하는 병졸과 관리들만이 주거할 수 있어 인가가 희소했다. 기록에 따르면 강희년간에 성경(요녕 심양지역), 길림(연변 포함.) 지방의 1만여명 기병(旗兵)들이 봉금지 내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였다고 한다. 강희, 함풍년에는 사람을 파견하여 순회, 감시하였고, 도광년간에는 해마다 통순(通巡)하고 대신을 파견하여 여러 곳의 관병들을 데리고 순시하게 했다. 일단 사사로이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을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 죽이거나 몰아내고 집을 허물어버리고 농작물을 짓밟았다. 연길 도심을 가로지르는 부르하통하도 포주하(捕珠河)여서 왕궁에 바칠 진주를 캐던 강이라고 한다.
그 때 이 땅에 대한 전설은 <<조 이삭은 허리띠만큼 길고, 감자는 물동이만큼 크고, 콩알은 열콩알 만큼하고, 옥수수이삭은 팔뚝 만큼하고, 호박은 쪽지게에 지도록 크고, 콩대는 지팡이를 만들만큼 굵고…>>(두만강의 충청도 아리랑)라는 것이었다.

1869년 기사년을 전후하여 엄중한 수재, 한재에 시달리던 한민(韓民)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이 땅에 밀려들었다. 200여 년이나 살찌기만 하고 비어 있은 땅, 그야말로 신이 유독 우리 민족에게 내린 땅이다. 대신 우리는 중국 조선족이 되어갔다. 이를 가리켜 숙명이라고 하리라. 월강령이란 무서운 형벌이 있었음에도 기민(饑民)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인접한 짜리 로씨야의 침범이 잦아지자 청정부는 연변지구 변방을 강화하기 위해 1885년에 두만강 이북 7백리 길이, 4,50리 너비를 <<한민수납지지(韓民收納之地)>>로 정하고 개간을 허락했다. 9년뒤 1894년에 나의 증조부님은 한 살이 된 나의 조부님을 업고 조국을 등진채 살길을 찾아 낯설은 이 땅에 들어서게 된다…

동북의  광활한 평원은 우리 조선족에 의해 수전(水田)으로 개발되었다. 입쌀이 유명해서 연변의 일부 논밭은 만주국시기에 강덕 황제의 어전으로 되였다. 지금도 연변입쌀은 중국에서 유명하다.
땅이 비옥하니 약초를 망라한 이 땅의 모든 것이 기름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차는 연길을 벗어나 부르하통하를 끼고 달리다가 왼쪽으로 굽어들면서 산길에 들어선다. 포장하지 않은 길이라 비에 질척거렸지만, 차창너머 젖은 풀숲에서 진한 풀 향기가 날아와 차안을 싱그럽게 했다. 가끔 앳된 송아지가 길에 뛰어들어 차가 주춤했다. 혼자일 때도 있고, 형제인지 친구인지 두세 마리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자연이 내린 선물이니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송아지는 천진한 눈빛으로 한참씩 차를 돌아다보다가 껑충껑충 녹음 속으로 사라진다.

약초답사의 첫 코스는 용정시 소기골(소箕溝), 낮은 산이 동서남 삼면에 둘러 싸여있어 소쿠리모양이라고 그렇게 부른다. 차가 인가가 있는 길 어귀에 이르자 닭, 오리들이 한가히 노니는 모습이 보이고 개 짖는 소리들이 들렸다. 녹음과 풀향기, 송아지, 개, 닭 등 이런 분위기만으로도 일행은 농부같이 편안히 자연에 어우러진다.

소기골 어귀에서 한 50대의 장년이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 일행은 동쪽의 나지막한 산을 향해 걸었다. 비포장 도로여서 오랜만에 신바닥에 느껴지는 진흙의 느낌이 친근하다. 나만 빼면 모두 전문가이다. 자연스레 뒤쪽에 처져서 걸으며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환성을 듣는다. 약초와 풀의 차이는 뜻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 의해 구분된다. 뜻이 있는 사람은 약초를 만나고 뜻이 없는 사람은 풀을 만난다.

싱그러운 내음이 풍기는 풀숲에서 전문가들은 자식이나 부르듯 약초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약초들은 웃으며 답하고 있으리라. 문외한의 눈에는 한낱 풀에 불과한 것인데, 약초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최대한 알아주는 전문가들의 혜안에 의해 풀숲에서는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생명의 천사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도꼬마리, 산사, 고삼, 장구채, 패랭이, 도라지, 솔나물, 뚜깔, 부추, 원지, 익모초…. 약초스타들은 하나하나 섬세히 촬영되고 있다.

그 중 부추는 우리 연변말로 《염지》라고 부르고 중국말로 《쥬차이(구菜)》라고 부른다. 염지는 돼지고기와 함께 물만두 속을 해서 먹거나 절여서 김치로도 먹는다.

우리 조선족은 부추 꽃을 소금에 절여 보신탕이나 육개장에 양념으로 넣어 먹고, 고추장처럼 밑반찬으로도 먹는다. 청나라 가경황제가 등극할 때 궁정에 천수연(千수宴)을 차렸다는 유명한 매운탕 길림화과(吉林火鍋, 솥이라는 뜻)가 있는데, 만족들의 이 요리에도 부추 꽃을 양념으로 넣는다. 한족 요리로 우리의 식탁에 경상적으로 오르는 부추 계란 볶음이 있는데, 한족들은 이 요리가 위를 덥히고 양혈하고, 신장과 허리, 무릎을 덥힌다고 한다. 부추에 새우를 볶거나 생부추와 가래토시(호두)를 메워서 먹기도 하는데, 이렇게 먹으면 양기를 돕는다고 한다.

일행 중 누군가 부추의 종자는 한방에서 구자라 하며 비뇨기계통의 질환에 이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염지(부추)씨가 변비에 특효라고 말씀하신다. 씨를 가루 내어 꿀에 재워서 환을 지어먹으면 노인들의 완고성변비가 곧 정상 변으로 풀린다고 한다.

이제 내 눈에도 부추의 가느다란 비늘줄기는 우아한 난으로, 머리에 인 하얀 꽃은 진주처럼 보이는 것은 풀이나 채소로가 아니라 약초로 만나게 된 까닭이다. 여전히 식탁이나 칼도마를 오르내리겠지만, 그래서 한결 더 편하게 만나며 자연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을 것이다. 자연을 가까이하면 약초는 부추같이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먹으리라.

멀지 않은 거리인데 길 옆은 약초 박람회(博覽會)마냥 걸음마다 일행의 발목을 잡아 꽤 시간이 걸렸다. 가파르지 않고 봉긋한 산등성이에 올라보니 상당한 면적의 밭에서 풋배추만큼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일부는 김을 맸고 일부는 비가 와서 김을 매지 못한 채로 있었다. 동우당제약회사의 도라지 재배단지였다. 허담원장은 좋은 약재를 만들기 위해 직접 중국 곳곳에 약초산지를 만든다고 했다. 도라지 밭도 그 중의 하나, 실농군을 구해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손작업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그는 자금을 투자한다고 하여 좋은 약재가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정성이 들어가야 좋은 약재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도라지꽃이 소기골의 동산을 보랏빛으로 물들일 9월이 앞에 있다. 약초는 뜻있는 사람과 만나고 질 좋은 약초는 뜻이 큰 사람과 만나는 모양이다. 인간 스스로 자연에 겸허한 태도를 취해야 자연의 보답을 받을 수 있는 모양이다. 가는 정성이 있어야 오는 정성이 있는 것이니, 인간세상에서도 그러려니와 자연에서도 이 하나의 도리로 통하는 것 같다.
약초에 대한 촬영을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하늘은 잠시 비를 멈추었다. 모두들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며 하늘에 감사했다. 촬영장비가 비를 맞아 촬영이 잘 되지 않을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효종 때부터 6·25 이전까지 대구지방에서 봄·가을에 개시되었던 한약재의 계절시장.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인(官人)들의 억상정책(抑商政策)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처에 보급된 향시제도(鄕市制度)는 교환경제를 발달시켰고, 이는 교환을 전제로 한 각종 재화생산을 전문화시켜 직업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1609년(광해군 1)부터 실시된 대동법에 의해서 더욱 촉진되었고, 대구약령시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대구는 경상좌·우도의 감영소재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한약재의 명산지가 인접해 있어 약령시의 발흥에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종래 상공(常貢)이나 별공(別貢)으로 관아에 수납했던 공물도 일단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약재는 용도에 관계 없이 원칙적으로 시장을 통해서만 조달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여건에 의해 대구약령시는 오랫동안 큰 시장으로 번창하였다. 처음에는 경상감영 서편 객사 주변에서 전개되었는데,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은 정해진 개시일 동안 관인의 지휘와 통제를 받고 객주(客主)·여각(旅閣)·거간(居間)의 중개 알선을 받으면서 상품을 매매하였다. 그 뒤 도시와 약령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07년 남문 밖 오늘날의 약전골목으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생산자·상인들의 활동 제약과 14년의 <조선시장규칙>에 의한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23년에는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가 조직되어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653년(효종 9) 경상감영 내 객사 주변에 개장되어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령시(한국기네스위원회 인증)이다. 1978년 10월 제1회 개장행사 개최 후 85년 약령시 상설전시관 개관, 88년 보건사회부 전통한약시장 지역 승인, 2000년 7월 문화관광축제 지정, 2001년 문화관광부 문화의 거리 지정, 2002년 5월 제25회 약령시를 개최하였다.”

이상은 ‘야후 백과사전’ 에 기록된 대구약령시의 내용이다.
서술한바와 같이 약령시는 350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의 한방약재 거리로 인정받고 있으며, 동양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약전골목 일대로 한약방, 한의원, 약업사, 인삼사, 제탕원, 제환소 등 350여 한방관련업소가 밀집해 있다.
저렴한 가격에 침, 뜸 등의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인삼을 비롯한 한방 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한약재도매시장과 함께 위치한 약령시전시관에는 각종 한약재가 망라되어 있고 한의서, 한방기구 등 한방관련 용품도 전시되고 있다.

약령동/서문

대구약령시 서편 입구에 전통 골기와 지붕형 일주문인 약령서문(藥令西門)은 고고한 자태로 대구약령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로서 지붕과 기둥 등에는 약재로 사용되는 동ㆍ식물과 환약재조 및 치병기도 장면들이 형상화 되어 있다.

그러나 동편 상징문 건립 사업은 인근 상가 주민들간의 찬반 갈등으로 공사 시작 1년이 넘도록 공사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도심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전락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002년 말부터 시작된 상징문 공사는 건립을 요구하는 약령시보존위원회측과 사유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는 인근 상인들의 반발로 진통을 겪고 있으며 법원은 지난해 4월 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같은해 9월 이를 다시 받아들인뒤 지금까지 공사는 중단되고 있다.


사단법인 약령시보존위원회

약령시 전승문화의 발굴과 보존 및 계승사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78년부터 발족하여 933년 문화법인으로 인가를 받은 약령시보존위원회는 대구약령시축제를 개최하고 (주)한약재도매시장과 한약재상설전시장, 대구약령시전시관 등을 차례로 설립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옴으로써 약령시 전승문화유산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구심체가 되어 왔다.

대구약령전시관 및 약초소공원

대구약령시의 350년 역사와 전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구약령시 전시관에는 1,000여점의 각종 한방유물과 자료들이 도입부와 재현부, 서적부, 약재부, 기구부, 박제실, 민속의료, 생약초실, 약초사진전시실 등으로 전시되어 있다. (개관 – 평일:9시~18시, 동절기 17시ㆍ공휴일,일요일:10시~17시)
뿐만아니라 전시관 주변에 지압보도와 건강 휴게시설을 설치하여 조성한 한방테마형 소규모 약령쉼터에는 애기똥풀, 박하, 관중, 국화, 식방풍, 우슬, 맥문동, 작약, 백합, 황기, 앵두 등등의 살아있는 약재를 볼수 있는 약초동산과 연계되어 있어 전시물과 생약을 함께 볼 수 있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주)한약재도매시장

 대구약령시전시관 1층에 위치한 도매시장은 영천의 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예전의 대구약령시를 전통 5일장과 경매를 통해 현대적인 개념으로 부활시킨 전국 유일의 한약재공판장으로서, 영천장날보다 하루 앞선 1일, 6일로 월 6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개시되며, 여기서 형성된 도매가격은 전국의 한약재 시세를 주도하는 공신력을 가지고 있다.
새벽부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약재를 전시하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따듯한 차한잔을 나눈다. 본격적인 경매는 11시부터 시작하는데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나 구매는 자격을 지닌 상인들만 할 수 있다.
경매를 하는 도중에도 서로 사담을 나누고 약초꾼들만의 우스게 소리도 오가며 매우 정겹게 진행되었다.

  

돌아오는 5월1일(토)~5일(수)까지 개장347주년 ‘2004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가 열린다.
‘2004대구ㆍ경북국제한의약박람회’도 4월 29일~5월2일 4일간 대구 전시컨벤션센터 EXCO에서 열리므로 주말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면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시골의 재래시장에는 볼거리가 많다.
영천의 장은 더욱 그러한 것이 재래시장과 약재시장이 함께 어우러져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곳곳에서 팔거리를 짊어지고 장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이 저렇듯 많이 모여 사는지, 장날이 되면 도시를 이룬다.

재래시장과 약재시장은 도로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약재골목 앞에서는 조금씩 모아온 약재를 정성스레 정리해놓고 주인을 기다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집해온 약재들은 대부분 야생이라 귀한 것이 많으나 요즘은 양도 많이 줄어들었다고들 한다.
농한기가 되면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곤 했는데, 그 수가 점점 줄어드니 당연히 양도 줄어든다.
재배와 야생은 약성의 차이가 크니 값이 비싸더라도 중병을 다스리는 한의사들과 민간인에게 잘 팔린다.
유근피와 가시오가피만을 가지고 나온이도 있다.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소일거리로 나오신 모양이다. 지구자, 상황버섯, 구기자, 오미자, 상백피, 황기, 더덕, 인삼, 마, 위령선, 골담초, 유근피, 잔대, 자초……
민간약재로 쓰이는 약재가 많이 나온다.

자초도 그 중에 하나인데 뿌리약이라 줄기가 말라 버린 겨울부터 싹 트기 전 초봄까지가 약성이 최고조에 달한다.
자초는 어린아이 팔둑굵기만 되어도 산삼처럼 대접을 받는다.
그도 그런 것이 10년이 되면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가 되고 2~30년이 되어야 어린아이 팔둑정도 된다.
건재보다 생물로 더 많이 유통이 되므로 살 사람을 먼저 정하고 약초를 캐는 경우가 많다.
방금전에 한 뿌리를 30만원에 팔았다고 제법 굵은 놈을 가지고 온 아저씨의 입담이 거세진다.

산도라지도 이렇게 굵은 야생은 보기 힘들다며 뇌두를 가리키며 재배는 뇌두가 없다고 한다.


가을에 건조된 조협도, 싹이난 맥아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옴니허브에서 겨울갈근을 판매한지 몇 해 지나 너도나도 겨울칡이라 판매할 때도 그랬지만 맥아도 싹이난 맥아가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한걸 보니 가슴한켠이 뭉클해진다.

재래시장엔 사람이 많고 약재골목엔 약재를 실어갈 차들이 늘어서 있다.
영천에서 몇해전 한약재 육성방안을 위해 ‘도동유통단지’를 만들어 많은 도매상들이 옮겨 갔지만 아직 정착되지 않고 두 곳에서 동시에 거래가 이루어진다.
도동유통단지는 관광차들이 들리기도 한만큼 시에서 육성하고 있다.


옴니허브에서는 작업하는 약재를 제외하고 수집하는 약재나 선별 약재는 할머니들이 소량씩 모아온 약재를 장날마다 조금씩 모아 작업을 하고 대량으로 필요한 약재는 약재골목에서 선별하여 재작업을 한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중에 우울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는 병원이나 시장에 가보라신다.
병원에가면 내 몸이 건강함에 감사를 느끼고 시장에 가게되면 사람사는 정이 느껴져서 일까?
매번 장이 열리지만 갈 때마다 새롭고 재미가 있다.
영천장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명소를 구경하는 것도 바다 바람을 쐬러 가는 것도 좋지만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한번씩 들러도 좋을 듯 하다.

천마 꽃대가 하나 올라왔으니 구경하러 오라는 전화에  카메라부터 챙겨들고 나선길입니다.
그 보기 힘들다는 천마꽃이 피었다는데…

실물로는 한번도 본적이 없어,  무주 가는길 내내 혹시나 그새 꽃대가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며칠 사이에 꽃이 다 시들어버리진 않았는지 급한 생각이 듭니다.

천마 꽃대는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사이 한때 잠시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하거니와  꽃대가 올라오는 놈은 번식력을 가지는 것으로 사람으로 치자면 장성한 처녀 총각…
재배를 시작한지 2∼3년은 지난것인데  보통은 그전에 채취해버리므로,  재배를 하는 약재이지만, 꽃을 보기가 힘든 이유입니다.

중국에서 재배법이 들어오기전에는 천마재배는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이걸 안가르쳐줬으면 누가 알고 재배를 해…   하 참∼,  중국놈들 신기하단말이야..”

안내하시는 분은 천마를 재배하신지 몇 년이 지나신 지금까지도 재배법이 희한하신지  연신 감탄사를 늘어놓으십니다.

천마는 뿌리로도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고, 태양빛을 듬뿍 받아야할 잎도 없는 기생식물입니다.
해서, 영양을 공급해줄 모체가 있어야하는법…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에  30cm정도 길이의 참나무 둥치를 세우고  구멍을 통해 종균을 넣고  종마를  달아준다음 흙을 덮습니다.

습도를 유지하고 그늘진 곳을 만들어주기위해
흙위에는 짚을 깔고  무성한 잎이 자라는 다른 식물들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아래로 자라는 데다 이렇게 위장술까지 쳐놓은 천마밭은  주인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겠지요. 천마 재배가 이렇게 보편화되기전,  천마밭 하나면 소한마리 끌고 나온다는 말이있었을만큼 한창 천마가격이 높았을때에는  야생 천마군락이라도 발견하면  다음번에 찾을 수 있는 표시를 따로 해놓아야할 만큼  꽁꽁 숨겨진채 자라는 식물이 또한 바로 이 천마입니다.

바람이 불때는 가만히 있다가  바람이 멈추면 홀로 흔들린다는  천마….
去風止痙 하는 효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흔들리는 바람에도 꼿꼿이 서있는 천마를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4월 중순의 강원도 정선 일대는 한해 농사 준비로 정말 새참 드실 짬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번에 저희는 강활, 일당귀, 토당귀, 일천궁, 토천궁 등의 새싹 올라오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갔었지만 워낙 바쁘게 일하시는 농민들 모습에 자칫 카메라 들고 찍는 것조차 누가 될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앙증맞게 솟아나는 여러 가지 약초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고, 다가올 여름에 더욱 무성해질 모습을 상상하면서 기분 좋은 며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갓올라온 강활의 새싹입니다. 뿌리부분을 함께 보세요


강활은 중국과 기원 식물이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려나 이곳에서 재배중인 강활(남강활이라고 함)은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채취한 자연산 모종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노력과 땀이 많이 배어있겠지요.

일천궁

토천궁입니다.

천궁의 기원식물을 고증하면 토천궁이 보다 가깝습니다만 약초재배 농가들은 점점 토천궁을 외면하고 일천궁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재배가 용이하고 수익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저희가 토천궁을 찾아 사용하고자 한다면 분명 토천궁이 널리 재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당귀입니다.


토당귀의 모습입니다.
사진에서처럼 일당귀와 토당귀는 그 모습과 느낌(感)이 같지 않습니다. 그 약성도 물론 갖지 않겠지요. 이를 구별해서 사용하는 한약재의 범위의 확대가 하루 빨리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본입니다.
삐죽삐죽한 잎의 모양이 또 뿌리에서 맡을 수 있는 향내가 그 약성을 짐작케 합니다.


백지입니다.
잎이 일당귀 비슷하지요. 뿌리를 씹어보면 얼마나 매운지.. 혀가 얼얼합니다

사실 일천궁이네 일당귀네 뭐 일시호네 일황련이네.. 하는, 또 천황련이네 토대황이네 회우슬이네.. 하는 갖가지 수식어들이 붙는 약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약재를 대할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함께 드는데 약재의 범위가 자꾸 넓어지는구나.. 각기 다른 장점과 약성을 갖는 약재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그 다종 다양한 약성을 잘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텐데..하는 어쩌면 섣부르고 건방진 염려가 듭니다. 하나씩 하나씩 정립되어 나아 가야할 부분이겠지요.

독활과 방풍(식방풍)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봄의 모습입니다만.

독활과 방풍.. 역시 말이 좀 있는 약재입니다만 봄에 솟은 이 모습은 정말 보기 좋고.. 반갑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린 생명만큼 보기 좋은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그 성질이 모난 면이 있다는 약초는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두충나무 심는 것이 유행처럼 시골에 번졌던 일이 있습니다.
한 10-20여 년 전쯤에 말입니다. 그때는 두충나무가 돈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노는 땅에 두충을 심곤 했습니다. 하지만 약재 성격상 10년 이상 키워야 상품성을 갖게 되고 생각처럼 경제성이 없어서 요즘엔 꾸어다 노은 보릿자루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경향이 있는 실정이지요. 심지어 돈을 안 받고도 저 나무들 좀 베어가라는 사람들까지 있는 편입니다.

이번 여정에 17-18년 된 두충나무 밭을 작업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들러 보았습니다.

생육 환경이 비교적 좋은 곳이라 두충나무들이 키도 큰 편이고 코르크층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얇았습니다. 전기톱으로 밑둥을 베어 큰 둥치는 아저씨가 작은 가지는 아주머니가 숟가락과 밥주걱을 이용해서 훌떡 벗겨냅니다. 깨끗한 속살이 보기 좋으면서도 그렇게 또 미안할 수 없네요.
당연히 요즘처럼 봄철에 나무에 물이 올라 있을 때에라야 수피가 목질부와 쉽게 분리됩니다. 모든 수피류 약재가 다 그렇지요. 잘리운 나무의 단면에서 나이테를 볼 수 있습니다. 기구를 이용해 코르크층을 제거하는 모습도 있네요.

한의사들은 항상 푸른 숲과 들판 속에서 살아갑니다.
약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약장을 봅시다.
약장서랍 속은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향기로운 풀내음이 가득한 자연 그 자체입니다.


2001년4월28일, 약장서랍 속 약재들의 자생지를 둘러보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暖帶로는 위도가 가장  높다는 안면도를 찾았습니다. 안면도에서도 꽃지해수욕장, 그 주변 해안가 낮은 산들을 뒤졌습니다.

산 속을 뒤지다가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안면도의 남단 영목항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찾은 민박집은 복음 민박. (이름과 달리 福音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4월 29일, 다음날 아침 민박집 이층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은 평화스럽기만 합니다.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잊지 못할 조개탕과 영목항 전경- 영목항 바닷가 끝까지 내려오면 현해탄이라는 횟집이 있습니다.
이 집의 조개탕은 평범한 바지락으로 끓이지만 아침 해장으로 먹은 그 맛은 최고였습니다.
(한그릇 5,000 원)

아침식사를 마치고 사구(砂丘 dune)에 자생하는 약초를 보기 위해 ‘바람아래’라는 멋진 지명을 가진 곳으로 향했습니다. 해변에 핀 통보리사초 군락 속에서 한 컷 찰칵 – 경희대 한의대 예과2학년 천남성동호회(?) 여러분과 정재민 식물분류학 박사님 입니다.

사구에서는 별 소득이 없어 다시 백리포해수욕장의 야산을 타기로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다본 바다

그리고 下山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월 31일 영천 보현산 자락
영천의 보현산은 예로부터 채약산이라 불리울 정도로 약초가 풍부한 산입니다.
잡목과 소나무가 적절히 자라면서 약초가 살 수 있는 틈을 내어줄 수 있는 산이기 때문이죠.
예로부터 보현산 자락은 영천이라는 큰 약재시장을 끼고 있어 약초를 많이 재배한답니다.
예를 들면 시호, 천궁, 백지, 삼백초, 어성초, 백작약, 황금, 토대황 …… 인데 다른 지역에 비해 종도 다양한 편입니다. 자, 시원하게 지프차로 보현산 자락을 한번 둘러보실까요.

백지를 심고 있는 광경이군요,
풀 때문에 비닐을 깐 다음 구멍을 뚫고 거기에 씨앗을 2-3개 살짝 묻으면 한달 쯤 지나 싹이 나온답니다.

비포장으로 들어가니 대구와 포항간의 고속도로를 뚫는 암반 터널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길가로 살구나무와 산수유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개화기에 내린 서리와 한파의 영향으로 꿀벌이 꽃을 찾지 못했답니다.
개화기에 꿀벌이 활동을 못한다면 수분이 되지 않아 열매의 작황이 떨어진다니 올해는 산수유가 아마 흉작이 되겠지요.

자 이제 약초가 심어진 농가에서 기지개를 켜고 올라오는 약초의 힘을 느껴보세요.

작약입니다.

목단입니다. 붉은 싹이 바로 꽃으로 펼쳐지는 특이한 형상이죠.

토대황입니다. 옆 사진은 건조중인 뿌리입니다.

익모초와 토천궁입니다.

백지와 감국입니다.

골담초의 싹이 돋고 독활의 촉이 땅을 뚫고 있습니다.

재래종 백하수오입니다.
오늘의 수확은 경제논리에 의해 사라져 가는 재래종 백하수오의 씨앗을 찾아낸 것이라 할까요?

산길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인동등이 나무를 감고 있군요.
멀리 보현산 천문대가 우리를 배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