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칡뿌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추억이 있습니까?

어릴 적 주전부리 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 조막손에 작은 괭이 하나 들고 뒷산에 올라가 어른들과 나무하러 왔다가 미리 점찍어 두었던 칡뿌리를 동무들과 함께 캐어냅니다.

하지만 칡뿌리를 캐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행히 비탈진 곳에 자리잡은 칡을 캐는 것은 정말 행운이지만 칡은 보통 잡목 틈 사이에 뿌리를 박고 있기 마련입니다. 잡목을 헤치고 땅속으로 뻗어 들어간 칡뿌리를 따라 땅을 파헤치다 보면 등은 어느새 땀으로 가득 찹니다. 칡을 캐다가 돌 틈으로 숨어버린 칡뿌리를 아쉬워 하다보면 어느새 한나절은 금방 지나가게 되어 캐낸 전리품들을 하나씩 메고는 산을 내려옵니다. 칡뿌리를 하루종일 질겅거리고 씹다보면 이뿌리가 얼얼해지고 입 주변엔 칡물이 들어 시커멓습니다. 시커매진 상대방을 바라보며 킬킬대고 웃어대던 어릴 적 추억들이 그립습니다.
이렇게 어릴 적 추억과 함께 한 칡도 한방에선 葛根(갈근)이란 이름으로 중요하게 쓰이는 귀한 한약재랍니다.

2. 칡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1] 무리 지어 새로운 영역을 찾아 뻗어 나갑니다. 보다 많은 햇살과 수분을 찾아서.
[2] 대나무가 그렇듯이 곧게 직승하는 것과는 다른 기상입니다.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옆으로 펼쳐지는 힘이 느껴집니다.

4월이 되면

보통 내륙지방에선 3월이 되면 겨우내 말라있던 칡등에서 칡순이 올라옵니다. 뱀의 혀 끝 같은 칡순이 바람에 날름거리며 치켜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올라오는 칡순을 꺾으면 맑은 잿빛 물방울이 똑똑 떨어집니다.

그만큼 겨우내 뿌리에 가둬 두었던 기운과 양분을 잎과 넝쿨을 번성케 하기 위해 펌프처럼 왕성히 뿜어 올리는 모양입니다.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칡순은 목을 늘리고 키를 키워 어느새 곁의 이웃 나무를 타고 넘습니다.

3. 매미소리 울리 무렵엔

매미소리가 울릴 즈음이면 온 산천은 칡넝쿨로 덮입니다.
오죽하면 무성하게 실타래처럼 꼬인 칡넝쿨의 형상을 보고, 풀기 어려워 번뇌함을 갈등이라 표현하였을까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같이 누리리라…..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려는 이 방원의 시조에서처럼 칡은 우리의 뇌리에 무성하고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이와 같이 산을 덮을 정도로 번성해지는 모습이 여름철 칡의 형상입니다.

4. 닭 벼슬처럼 칡 넝쿨위로 내려앉은 칡꽃, 갈화

무성한 칡넝쿨 위로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 같은 칡꽃이 핍니다.

전신주를 타고 올라간 칡넝쿨 위로 칡꽃이 줄레줄레 내려앉고 그것도 잠깐 가끔씩 쏟아지는 빗줄기에 꽃잎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 꽃자루가 보이면 칡꽃이 피었던 자리에 콩깎지가 달리게 됩니다.

칡꽃은 밑에서부터 위로 피어 오릅니다. 밑은 시들고 위는 아직 덜 피었지요. 이렇게 위로 솟는 기운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5.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칡의 순은 말라 부러져버리고 가끔씩 불어오는 친바람에 옻을 노란색 단풍잎으로 갈아입고 그처럼 싱싱하고 질겨 보였던 줄기도 말라 갑니다.
줄기가 모두 말라버린 뒤 칡이 온 줄기와 잎에 퍼져있던 기운과 생명력을 아래로 아래로 모아내려 뿔리에 갈무리해두면 약초꾼은 칡뿌리를 찾아 산으로 들어갑니다.


가을에 접어들면 이처럼 그 화려했던 꽃은 시들어 져버리고 결실을 맺는 꼬투리를 만들어 냅니다.

여름의 그 무성함은 추억 속으로… 이제는 쇠락한 칡덤불이 됩니다. 하지만 그 기운은 전부 땅속 칡뿌리에 간직되어 있겠지요…

6. 칡은 언제 캐어야 약성이 좋을까요?

칡의 라이프 사이클 가운데 칡의 기운이 뿌리에 모아지는 시간대는 줄기가 말라버린 늦가을에서부터 겨울을 거쳐 다시 칡순이 올라오기 전인 이른 봄까지 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름에 우리가 칡뿌리를 캐어 먹어 본다면 전분이 거의 없는 거칠기만한 칡뿌리를 씹게 됩니다. 반면에 겨울 칡은 살칡이라 할 정도로 전분이 많은 맛있는 칡임을 먹어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칡도 정신이 모아지는 그 곳에 약성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불뚝불뚝 힘이 가득 배인 칡뿌리가 눈을 헤치고 파낸 땅 속에 숨어 있습니다.

여름 칡처럼 질기기만 한 섬유질 덩어리가 아니라 겨울칡은 이처럼 한입 베어 물어 씹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합니다. 섬유질 사이사이 가득 베인 칙의 속살이 맛있어 보이네요…

*. 녹용(鹿茸)과 비견할 만한 칡순…

칡뿌리 뿐만 아니라 봄철의 칡순도 뛰어난 약재랍니다.

봄철 칡순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또아리 튼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을 연상하는 이유는 어딘가로 뻗기 위해 팽팽해진 그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방에서 칡순을 葛茸(갈용)이라하여 녹용(鹿茸)과 같이 대우함은 뚫고 뻗어나가는 힘이 녹용 못지 않기 때문입니다.

솟아 올라 사방으로 펼쳐지는 기상이 부드럽게 보이면서도 내면에 간직된 힘이 느껴집니다.

칡순 즉 갈용과 실제 사슴뿔인 녹용의 모습입니다. 사슴의 머리를 뚫고 솟은 뿔과 땅을 뚫고 솟은 칡순은 서로 너무나 닮은 기상이 느껴집니다.

*. 음주 후의 갈증과 주독을 풀어내는 칡꽃 : 갈화

또 여름철 칡꽃이 활짝 피기 전에, 다시 말하면 칡꽃을 뜯어도 꽃이 헝클어지지 않을 때 따서 응달에 널어 말려 두었다가 주독(酒毒)이 심할 때 차로 달여 먹는다면 음주 후의 갈증과 주독을 풀어내는 데 좋은 약차가 될 것입니다.

비록 뙤약볕이 내리 쬐는 날 칡꽃을 딴다 하여도 칡꽃의 향내가 너무 달콤하고, 사랑하는 그이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꽃 따는 일이 고되지 않을 것입니다.
행여 칡꽃을 좋아하는 벌레가 꽃 속에 숨어 있다면 응달에 널어 말릴 때 설탕물을 주위에 조금 뿌려두면 벌레가 빠져 나오게 됩니다.

포도송이 못지 않게 탐스런 칡꽃송이

향기로운 칡꽃입니다. 약으로 쓸 적에는 활짝 피기 전에 향기를 아직 머금고 있을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향기가 날아간 꽃은 그만큼 힘이 적어졌으니까요.

* 겨울칡 작업

이와 같이 칡은 다양하고 좋은 약성을 가진 한편, 인간과 아주 가까운 식물로서의 역할도 오랜세월 동안 수행해 왔습니다.
어린 적 주전부리 거리고, 기근이 들어 굶을 땐 구황식물로, 갈증 날 땐 즙을 짜내어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고마운 존재로서 그 자리를 지켜주었을 뿐 아니라 풍부한 녹말을 가지므로 갈분 국수나 갈분다식, 갈근엿까지 약간은 호사스런 음식으로도 변하여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들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또 칡이 산에만 있어선 안되고 캐내어져 사람 사는 곳으로 옮겨져야 되겠지요.

[그림1] 한겨울에 눈 속에서 칡을 채취해야 가장 좋은 약성을 간직한 칡을 캘 수 있습니다.
[그림2] 깉은 산 속이라 지게를 이용해서 산을 내려 옵니다. 이제 다 모아서…, 절단하고…, 건조하고…, 포장되어…, 한의원의 한약장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드디어 가장 값있게 칡의 소명을 다하게 되겠네요.

1. 채 취

겨울 칡 작업은 잎이나 꽃이 없기 때문에 말라버린 덩굴과 콩깍지처럼 생긴 꼬투리를 먼저 찾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다음에는 힘든 땅파기! 곡괭이를 이용해 칡 주변이 흙을 파내어야 하는데 그 일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해 본 분만이 알 수 있지요..
게다가 겨울이라 꽁꽁 얼어버린 흙이라니.

힘들게 캐어낸 칡은 이제 깊은 겨울산 속의 유일한 운반수단인 지게에 실어야 합니다. 보기에도 무겁지만 실제는 훨씬 더 무겁습니다. 역시 들어본 분만이 알 수 있지요…
눈길이고.. 또 무거운 칡을 얹은 지게가 그리도 무거울 수 없습니다. 매서운 겨울 바람속에서도 후끈 후끈 땀이 날 정도니까요. 쉬엄쉬엄 그리고 조심조심 산을 내려오고..
힘들었지만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며 작업장을 향해 갑니다.

2. 절단

지게로 지어 나른 칡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곳까지 옮겨지면 트럭에 실려서 절단 작업을 하는 곳까지 다시 운반됩니다. 그리고는 작업장에 산처럼 쌓이게 되고.

절단 과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힘센 사내의 팔뚝과 같은 속이 꼭 찬 칡의 단면을 보노라면 봄, 여름, 가을의 그 무성하게 펼쳐졌던 모습이 이렇게 응축되어 맺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캐어낸 칡 조직 사이로 보이는 하얀 덩어리진 것들은 옛적에 구황식품으로서 배고픈 백성들을 연명시켜 주었고 또 그 녹말성분으로 해서 갈분 국수, 다식 그리고 갈근엿으로까지 변모하여 별미꺼리가 되어 주었던 고맙고 친근한 먹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약초꾼들에 의해 깊은 산속에서 캐어져 청결히 절단 가공되고 또 건조되어 한약장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3. 건조

절단을 마치면 볕 좋고 공기좋은 시골 마을 너른 마당에서 건조시킵니다.
한약재라는 것은 건조과정을 통해 한약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데 보존에도 유리하고 같은 무게와 부피에 훨씬 많은 힘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화꽃 문양의 층을 이룬 갈근의 모습이 약효를 거듭거듭 쌓아 간직한 듯합니다. 이렇게 간직된 칡의 힘으로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경남 거창 시골 마을에서 겨울칡 작업은 마무리 됩니다.

먼지없고 깨끗한 환경 속에서 건조되는 과정인데 채취나 절단 과정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지요.

예전에 일부에선 무조건 하얀 것이 깨끗하고 좋은 약재라 여기고 또 외관상의 상품 가치에 치중하여 옳지 못한 건조방법을 택하거나 절단한 칡을 물로 빠는 등의 관행이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건조되는 과정 가운데 생기는 거뭇한 색깔은 오히려 칡의 진액이 응축된 힘있는 부분인 것입니다.

매섭기도 하지만 시원한 겨울바람과, 겨울이지만 따스한 햇살을 받아 이렇게 겨울칡은 건조되어집니다. 볕만 좋다면 사나흘 동안만 밀려도 속까지 바짝 마르게 됩니다.